이승만의 기독교입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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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
1945년 10월5일 뉴욕 공항에서 이승만의 귀국길에 프란체스카 여사와 미국인 친구들, 그리고 구미위원부 임원들이 배웅 나왔다. 역사적인 귀국길에 오르면서 이승만은 말했다.
“나 한 사람은 오든지 가든지, 죽든지 살든지 일평생 지켜오는 한 가지 목적으로 끝까지 갈 것이다.”
그 한가지 목적은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꾼 이승만의 신앙
이승만 집권 시기 가장 중요한 종교적,문화적 특징은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의 확산이다.
20대 초반 한성감옥 시절 사형수 이승만은 “동양 최초의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이승만을 가까이에서 겪은 이들은 한결 같이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을 증언한다.
그가 1903.9월 신학월보 올린 글 <두가지 편벽됨> 에는 이런 글이 있다.
“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서 딸려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잡히나니 이럼으로 교화로써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하고 순리된 바로다. 이것을 생각지 않고 다만 정치만 고치고자 하면 정치를 바로잡을 많나 사람도 없으려니와 설령 우연히 발 잡는다 할지라도 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요.”
또 일제시대에는 “한국교회 핍박”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기독교방해와 회유,협박에 대한 구체적인 당시 상황, 하지만 기독교 정신을 먹지 못한 이유들로써 고난의 기독교정신에 대해 쓰기도 한다.
기도로 시작된 제헌국회
그는 공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언급하고 기도의 기회를 만들었다.
1946년 3.1절 기념행사에서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히 자유 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의 복을 누리도록 노력하자고 연설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회할 때, 이승만은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종교 사상에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국회의원이자 목사인 이윤영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민족의 대표가 되었음을 고백했다. 최초의 국회의원들이 모두 일어서서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이 나라 국회가 시작된 것이다.
국회의장 자격의 <맹세문>에서 “하나님과 애국선열과 삼천만 동포 앞에” 선서했으며, <국회 개원식 축사>에서는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 앞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맹약했다.
이승만은 기독교 국가들의 선례에 따라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했다.
이같은 기독교식 국가의전은 기독교 신앙의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인 등용
당시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5%도 못미치는 한국사회에서 그가 임명한 135명의 장관급 고위직 가운데 47.7%가 기독교인이었다.
교회가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했던 것과 관련, 기독교인들은 교육 수준이 높았고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이승만 외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 해방 정국의 지도자들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이는 교회가 인재를 길러내는 요람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처신으로(제 1공화국의 부정부패) 교회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기독교인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이처럼 양날의 검이다.
한국 복음화에 기여한 제도, 노력들
앞서 말한 국가의식의 기독교화, 기독교인 등용 외에도 군종제도, 국기 주목례실시, 군대의 군목제도, 형무소의 형목제도, 기독교신문과 방송국, YMCA 지원 등의 노력으로 기독교를 확산시키고자 했다.
특히 군종제도는 1951년 2월 7일 전쟁 중 공식적으로 실시되어 약 1년동안 육군, 해군, 군병원에서 활동한 결과 개종자는 무려 수만명에 이른다. 1954년에 이르러서는 전체 군 장병 가운데 20%로 기독교인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50년대 중반 교회역사가 김양선은 “군종 사업은 한국 기독교 반세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획기적인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또 국기에 대한 경례도 일제시대 영향을 따라 국기 앞에 절을하는 배례를 했는데, 한국기독교연합회의 요청으로 배례를 ‘주목례’로 변경하고(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놓고 국기를 주목하는 형식) 베례라는 구령도 ‘주목’으로 바뀌었다.
이승만대통령 혼자 기독교 건국을 향해 노력한 것은 물론 아니다.
신탁통치가 결정된 직후인 1946년 1.1일에서 3일까지 한국교회는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 하에 있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다. 십자가의 건국 이념,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회적 구현을 추구하는 기독교 단체가 설립되기도 했다.
신민회는 설립 취지서에 이렇게 말한다.
“금일의 조선 기독교인은 국가의 흥망, 종교의 성쇠를 확고히 인식하여... 종파, 교리, 교의에서 단연 초월하여 대동단결로서 일대 구국 운동에 참가할 것이다.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결합한 민족 신생 운동은 기독교 자신과 조국 조선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출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다.”
대통령과 교회, 정치인들과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합심하여 기독교의 확산에 주력한 결과, 해방 당시 10만명 전후에 불과했던 기독교인은 이승만이 물러난 1960년 114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아시아에서 유래가 없는 기독교의 폭발 성장이었다.
기독교와 반공
이승만 연구가들은 그의 반공노선은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무신론, 유물론인 공산주의로부터 기독교인과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반공을 강하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산주의 북한과, 기독교로 입국한 대한민국은 그 발전에 천지 차이가 난다.
이승만 이후로 ‘반공 기독교’는 한국교회의 강한 전통이 되었다. (간혹 주체사상과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혼미한 목사들과 기독언론들이 있지만) 오늘날에도 탈북자 구출사역, 북한 자유화를 위한 투쟁에 상당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앞장서고 있다.
[출처]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